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릴레오 갈릴레이 (문단 편집) == 성격 == 갈릴레오는 논쟁을 즐기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당시 기독교를 독실히 믿던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의 인물로 찍혔었다. 그의 편지에서는 '내 말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열받는다'는 식의 불평이 여러 번 발견된다. 대표적인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 보자면 * 대학생 시절부터 그는 강사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서 '''논쟁꾼'''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갈릴레오와 대학 간의 관계는 한번도 원만한 적이 없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교편을 잡아 온 강사들을 조롱하고 비판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낡은 생각을 양처럼 고분고분 받아들인다고 동료 학생들을 비난했다. 그의 이런 반골 기질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아서 기존 학자들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 1591년 갈릴레오가 피사 대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하던 무렵 그는 강한 주장과 급진적인 과학 의견 때문에 동료 교수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그는 특유의 거만한 태도로 선배들을 조롱하며 그들이 구식 사고 체계에 노예처럼 매여 있다고 비난했는데, 비난이 지나쳐서 무모한 지경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갈등을 빚은 교수들이 일부러 갈릴레오의 수업에 학생들을 심어둬서 질문 공세를 퍼부으며 수업을 교란하는 일도 있었다. * 1592년에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가 피사에서 가까운 리보르노 마을의 항구를 개량하는 대규모 기술 사업을 승인하면서, 아버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서자인 조반니 데 메디치가 발명한 기계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근데 갈릴레오는 '''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거라면서 대놓고 깠다'''(...) 이건 곧 발명가인 조반니 데 메디치를 비난한거나 다름없었고, 심지어 메디치 가는 피사 대학교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스폰서를 까다니 패기 보소~~ 1592년 가을, 갈릴레오는 계약이 끝나자마자 대학에서 해고당했다. * 본격적으로 [[교황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을 때 갈릴레오는 로마에 찾아가 이집 저집 다니며 수십 명과 논쟁을 벌였다. 피렌체 대사인 귀차르디니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는 열정적으로 싸움에 몰두해서, 주변 상황을 전혀 보거나 느끼지 않는다……이것은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며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기록을 남겼다. * 갈릴레오는 교황청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가설 이상으로는 가르치거나 쓰지 않겠다'고 흔쾌히 약속했고 갈등은 일단락됐지만 이후에도 로마에 남아 사람들과 논쟁을 계속했다(...). 귀차르디니는 갈릴레오의 후원자였던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에게 '갈릴레오는 [[수도자]]들과 고집을 겨루고, 공격했다가는 자기만 망할 것이 뻔한데도 명사들과 다툴 기세입니다. 그가 미친듯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는 소식을 피렌체에서도 곧 듣게 되실 겁니다.' 하는 내용으로 편지를 썼고, 코시모 2세는 갈릴레오를 피렌체로 다시 소환했다. * 갈릴레오는 조석 현상의 원인을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 그는 조석 현상이 [[지구]]의 움직임과 관련있다고 믿었는데, 당시에도 조석 현상이 [[달]]과 지구의 인력 때문이며 지구의 공전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무덤에 갈 때까지도 이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 갈릴레오가 재판에 회부되고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교황청이 부추기지 않아도 많은 학자들이 얼씨구나 들고 일어나서 그를 공격했다. 갈릴레오가 그동안 적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